에펠탑은 오늘날 파리를 넘어 프랑스 그 자체를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이죠. 누구나 파리 여행을 꿈꾸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바로 그곳이잖아요? 반짝이는 조명을 배경으로 인생샷을 남기는 상상, 한 번쯤은 다들 해보셨을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전 세계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 에펠탑의 시작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지금의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건설 당시에는 파리의 경관을 망치는 “흉측한 철골 덩어리”라는 혹평에 시달리며 온갖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심지어 얼마 뒤 철거될 운명이었다고 해요. 오늘은 파리의 애물단지에서 어떻게 모두가 사랑하는 영원한 상징이 될 수 있었는지, 에펠탑의 파란만장하고도 극적인 비하인드 스토리를 자세히 들여다볼까 합니다.

상상을 현실로 만든 경이로운 건설 과정
이야기는 18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파리 만국박람회를 앞두고, 주최 측은 박람회의 입구 역할을 할 기념비적인 상징물을 공모했어요.
무려 107개의 쟁쟁한 경쟁안을 제치고 최종 채택된 것은 프랑스의 교량 기술자였던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의 회사에서 제출한 설계안이었습니다. 사실 이 아이디어의 초기 구상은 에펠의 수석 엔지니어였던 모리스 쾨클랭과 에밀 누기에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요.

그들의 설계는 당시로서는 정말 상상조차 하기 힘든 300미터 높이의 거대한 철골 구조물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높은 탑을 짓는 것을 넘어, 산업혁명 시대가 이룩한 프랑스의 위대한 기술력을 전 세계에 보여주려는 야심 찬 계획이었죠.
건설 과정은 그야말로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공사는 1887년 1월에 시작해서 만국박람회 개막 직전인 1889년 3월 말에 끝났는데, 이 거대한 건축물을 짓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2년 2개월 5일밖에 되지 않았어요.
더욱 놀라운 것은 정밀함이었습니다. 에펠탑에 사용된 1만 8천여 개의 모든 철골 부재는 파리 외곽에 있는 에펠의 공장에서 10분의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정밀하게 사전 제작되었습니다. 덕분에 건설 현장에서는 마치 거대한 레고 블록을 조립하듯 빠르고 정확하게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죠.

증기 동력 크레인 같은 당시의 최첨단 기술이 총동원되었고, 특히 센강 바로 옆의 연약한 지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압축 공기를 이용한 ‘잠함 공법’이라는 신기술을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최소한의 인력으로,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안전하게 완공되었으니, 에펠탑은 그 존재만으로도 하나의 위대한 공학적 성과였던 셈입니다.
파리의 수치라 불렸던 거대한 고철 덩어리
하지만 이 혁신적인 기술력에 대한 찬사 이면에는 아주 거센 비판이 숨어 있었습니다. 건설 계획이 발표되자마자 파리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그야말로 벌 떼처럼 들고일어났어요.
소설 《여자의 일생》으로 유명한 기 드 모파상, 오페라 《파우스트》를 작곡한 샤를 구노, 파리 오페라 하우스를 설계한 당대 최고의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예술가들이 ‘에펠탑 반대 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그들은 “쓸모없고 흉측한 에펠탑”이라는 제목의 청원서를 신문에 발표하며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우리 작가,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은 지금까지 완벽하게 보존된 파리의 미를 위협하는, 쓸모없고 흉측한 에펠탑의 건설에 온 힘을 다해 항의하는 바이다… 이 어지러운 철골 덩어리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을 압도하는 악몽이 될 것을 생각해보라!”
이처럼 그들의 눈에 에펠탑은 예술의 도시 파리에 어울리지 않는, 차갑고 검은 공장 굴뚝과 다름없는 흉물이었습니다. 고풍스러운 파리의 스카이라인을 망가뜨릴 거대한 ‘철골 야만인’으로 취급받으며 에펠탑은 뜨거운 미학적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죠.
성공적인 데뷔와 시한부 운명
온갖 비난과 논란 속에서도 에펠탑은 꿋꿋하게 올라갔고, 마침내 1889년 5월 6일, 만국박람회의 개막과 함께 화려한 입구로서 대중에게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대성공이었습니다! 예술가들의 혹평이 무색하게도, 일반 대중들은 이 거대한 철탑에 열광했습니다. 박람회가 열리는 동안에만 약 200만 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에펠탑을 방문했고, 난생 처음으로 아찔한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파리의 환상적인 전경에 넋을 잃었죠.

에펠탑은 프랑스의 뛰어난 산업 기술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가장 성공적인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눈부신 성공에도 불구하고, 에펠탑은 처음부터 20년만 유지한 뒤 철거될 운명의 ‘임시 건축물’이었습니다. 파리 시와의 계약에 따라 1909년이 되면 깨끗하게 사라져야 할 존재였던 거죠.
에펠탑을 구한 예상 밖의 쓰임새
철거의 운명 앞에 놓인 에펠탑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설계자, 귀스타브 에펠 자신의 지혜와 과학 기술의 발전이었습니다. 에펠은 자신의 탑이 단순히 구경거리에 그치지 않고, 과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녔음을 증명하고 싶어 했어요.
그는 사비를 들여 탑 꼭대기에 기상 관측소를 설치하고, 공기 저항이나 항공 역학 실험을 진행하는 등 에펠탑의 과학적 활용도를 끊임없이 모색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세기 초 새롭게 등장한 무선 전신 기술이 에펠탑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300미터라는 압도적인 높이는 당시 막 발전하던 무선 통신용 안테나를 설치하기에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1903년, 프랑스군은 에펠탑에 장거리 군용 무선 통신 장비를 설치했고, 이는 대성공을 거두었죠.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에펠탑의 안테나가 독일군의 암호 통신을 감청하고, 최전방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등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파리의 흉물’이 ‘파리의 수호자’가 된 순간이었죠.
이처럼 통신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필수적인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면서 에펠탑의 존재 가치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게 되었고, 철거 계획은 자연스럽게 백지화되었습니다.
논란을 넘어 파리의 영원한 심장으로
철거 위기를 멋지게 극복한 에펠탑은 이후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을 위한 송신탑 역할까지 수행하며 파리의 심장부에서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켰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 수많은 역사의 격동기를 묵묵히 지켜보며, 에펠탑은 점차 파리 시민들의 삶과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습니다. 한때 에펠탑을 그토록 혐오했던 예술가들조차 점차 그 독특한 조형미에 매료되기 시작했죠.

오늘날 에펠탑은 연간 약 700만 명이 찾는 세계 최고의 관광 명소이자, 수많은 영화와 문학,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밤마다 수만 개의 조명이 파리의 밤하늘을 밝히는 에펠탑의 모습은 이제 낭만과 예술의 도시 파리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었죠.
처음에는 흉물스러운 고철 덩어리라 비난받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며 살아남은 에펠탑. 그 역사는 기술과 예술, 그리고 한 도시의 역사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영원한 상징으로 거듭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답고 극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