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여행 가기 전 꼭 알아야 할 콜로세움의 비밀 (ft. 채석장, 네로의 호수)

최종 수정일: 2025년 10월 23일

콜로세움은 이탈리아 로마에 가면 그 누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로마 제국의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이죠. 사진이나 영화에서만 보던 그 거대한 규모와 압도적인 분위기는 직접 마주했을 때 정말 숨이 멎을 것 같은 감동을 주는데요.

하지만 콜로세움은 단순히 거대하고 멋진 경기장을 넘어서, 고대 로마 제국의 어마어마한 힘과 경이로운 공학 기술, 그리고 그들의 문화까지 모든 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 그 자체입니다.

원래 이 건물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Amphitheatrum Flavium)’이었다고 해요.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은 이 경기장을 지은 황제 가문의 이름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이곳을 ‘콜로세움’이라는 훨씬 더 유명한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장엄하고도 무시무시했던 건축물은 과연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요? 그 안에서는 또 얼마나 끔찍하고도 화려한 광경이 펼쳐졌으며, 왜 지금은 반쯤 무너진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게 된 것일까요? 오늘은 그 영광과 잔혹함이 뒤엉킨 콜로세움의 깊은 역사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려 합니다.

해 질 녘 로마 콜로세움의 웅장한 외관

폭군의 호수를 메우고 세운 정치적 상징물

콜로세움의 탄생 비화는 아주 치밀한 정치적인 계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야기는 서기 64년, 로마 시내를 잿더미로 만든 ‘로마 대화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당시 폭군으로 악명이 높았던 네로 황제는 이 화재로 폐허가 된 도심의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에 자신의 호화로운 황금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를 건설했습니다. 특히 이 궁전 부지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인공 호수까지 만들어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찔렀죠.

결국 서기 68년, 네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몰락했고, 로마는 ‘네 황제의 해’라고 불리는 극심한 혼란기에 빠집니다.

이 혼란을 수습하고 새롭게 권좌에 오른 인물이 바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였습니다. 그는 ‘플라비우스 왕조’를 연 시조로서, 네로 황제에게 등을 돌렸던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다시 얻고 자신의 통치 기반을 튼튼하게 다질 필요가 있었어요.

그의 가장 강력하고 상징적인 정책이 바로 ‘콜로세움 건설’이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의 사치와 향락의 상징이었던 그 거대한 인공 호수를 흙으로 메워버리고, 바로 그 자리에 모든 시민을 위한 거대한 공공 원형 경기장을 짓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은 “네로가 독차지했던 땅을 다시 로마 시민들에게 돌려준다”는 아주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정치적 메시지였죠.

로마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

건설은 서기 70년에서 72년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시작되었고요, 안타깝게도 그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를 이은 아들 티투스 황제 때인 서기 80년에 마침내 완공되었는데, 티투스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무려 ‘100일’ 동안이나 어마어마한 축제를 열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우리가 잘 아는 콜로세움의 지하 구조물, ‘히포게움’ 등이 추가로 완성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죠.

아, 그럼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원래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이라고 했잖아요.

여기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이야기는 경기장 근처에 네로 황제가 자신을 태양신 모습으로 형상화해서 세웠던 거대한 청동상, ‘콜로서스(Colossus)’에서 유래했다는 것입니다. ‘거대하다’는 뜻의 라틴어 ‘콜로살레(Colossale)’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요. 어쨌든 그 압도적인 규모 덕분에 이런 별명이 붙게 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시대를 초월한 로마 건축 공학의 정수

콜로세움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시각으로 봐도 정말 경이로운 건축 공학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 규모부터가 어마어마한데요. 타원형 구조로, 긴 쪽 지름이 약 188m, 짧은 쪽이 약 156m, 그리고 높이는 무려 48m에 달했습니다. 아파트 15층 높이와 맞먹는 수준이었죠.

추정되는 수용 인원은 최소 5만 명에서 최대 8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오늘날의 잠실 주경기장이나 월드컵 경기장과 맞먹는 규모를 2,000년 전에 지어낸 것입니다.

콜로세움 내부 아치 구조와 관중석

이 거대한 구조물을 지탱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로만 콘크리트(Opus Caementicium)’였습니다. 로마 건축의 가장 위대한 혁신 중 하나죠. 화산재를 섞어 만든 이 특수 콘크리트는 오늘날의 콘크리트보다 훨씬 강하고 내구성이 뛰어났으며, 특히 아치(Arch) 구조를 만드는 데 최적이었습니다. 외벽은 트래버틴(Travertine)이라는 고급 석회암으로 아름답게 마감했고요.

제가 정말 감탄했던 부분은 바로 ‘신속한 입퇴장 시스템’입니다.

콜로세움에는 총 80개의 아치형 입구, ‘보미토리아(Vomitoria)’가 있었습니다. ‘토해내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이름인데, 말 그대로 5만이 넘는 관중들을 순식간에 쏟아내고 빨아들일 수 있었죠.

기록에 따르면 이 80개의 입구를 통해 5만 명이 넘는 관중이 경기장을 가득 채우거나 빠져나가는 데 걸린 시간이 불과 15분 남짓이었다고 하니… 정말 상상이 가시나요? 요즘 대형 콘서트장 입퇴장 때의 혼잡함을 생각하면 로마인들의 설계 능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콜로세움의 신속한 입퇴장 통로 보미토리아

경기장 내부는 더욱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었습니다. 관중석(Cavea)은 신분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되었는데요, 그야말로 로마 사회의 축소판이었죠.

가장 아래층, 아레나(경기장 바닥)가 잘 보이는 1층(Podium)은 당연히 황제와 원로원 의원 같은 최고위층의 자리였습니다.

2층은 기사 계급, 3층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평민 남성들의 차지였고요. 가장 꼭대기 층인 4층은 나무로 만든 좌석이었는데, 이곳에는 여성이나 노예, 빈민 등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앉아서 경기를 관람했다고 합니다.

무대 아래 숨겨진 비밀 공간 히포게움

콜로세움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사실 우리 눈에 보이는 거대한 관중석이 아니라, 경기장 바닥(아레나) 아래에 숨겨진 ‘히포게움(Hypogeum)’이라는 공간입니다.

‘지하’라는 뜻을 가진 이 2층짜리 복잡한 지하 공간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추가로 건설되었는데요, 이곳이야말로 잔혹한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심장부였습니다.

이곳에는 검투사들이 출전을 기다리는 대기실,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잡아 온 사자, 호랑이, 곰 같은 맹수들을 가두는 우리, 그리고 온갖 무대 장치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습니다.

콜로세움 지하 구조 히포게움 모습

더욱 놀라운 것은, 수십 개의 승강기(엘리베이터)와 램프 장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관중들이 경기에 한창 몰입하고 있을 때, 이 승강기 장치를 이용해 검투사나 굶주린 맹수들을 아레나 한복판의 함정 문을 통해 ‘짠!’ 하고 극적으로 등장시켰던 것이죠. 이런 무대 효과는 관중들의 흥분과 열광을 극대화시켰습니다.

관중을 위한 거대한 천막 지붕 벨라리움

로마인들의 세심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콜로세움 상부에는 ‘벨라리움(Velarium)’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천막 지붕을 쳐서, 뜨거운 로마의 햇볕이나 비를 가리고 관중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했습니다.

이 거대한 차양막은 어떻게 작동시켰을까요? 놀랍게도 로마 해군 함대의 숙련된 선원들이 직접 동원되어, 돛을 다루는 기술을 응용해 이 거대한 천막을 치고 걷었다고 합니다.

경기장 하나를 운영하기 위해 해군까지 동원했던 로마 제국의 스케일,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콜로세움 차양막 벨라리움 설치 흔적

로마 시민을 열광시킨 빵과 서커스

그렇다면 이토록 거대하고 화려한 콜로세움에서 로마 시민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며 열광했던 걸까요?

콜로세움은 로마 시민들에게 ‘빵과 서커스(Panem et Circenses)’를 제공하는 핵심적인 장소였습니다. “시민들에게 공짜 빵과 공짜 볼거리(서커스)를 제공하면, 그들은 정치에 무관심해지고 불만을 잠재울 수 있다”는, 일종의 우민화 정책이었죠.

그리고 그 ‘서커스’의 내용은 상상 이상으로 지극히 잔인하고 폭력적이었습니다.

콜로세움의 꽃 검투사들의 결투

콜로세움의 메인 이벤트이자 하이라이트는 단연 ‘검투사 결투(Munera)’였습니다.

노예나 전쟁 포로, 혹은 죄수들로 구성된 검투사(글래디에이터)들이 목숨을 걸고 서로 싸웠습니다. 때로는 다른 무기를 든 검투사끼리, 때로는 맹수와 처절한 사투를 벌이기도 했죠.

이들은 가장 비참한 신분이었지만, 싸움에서 승리하고 살아남은 검투사는 오늘날의 슈퍼스타 스포츠 선수 못지않은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기도 했습니다. 자유를 얻는 경우도 있었고요. 시민들은 이들의 싸움에 열광하며 환호하거나 야유를 보냈습니다.

고대 로마 검투사 결투 모자이크

제국 전역에서 온 맹수들의 사냥 쇼

‘베나티오네스(Venationes)’라고 불리는 ‘맹수 사냥’ 쇼도 엄청난 인기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동물을 사냥하는 것을 넘어, 로마 제국의 힘을 과시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사자, 북유럽의 곰, 중동의 호랑이, 심지어 하마나 코끼리까지 제국 전역에서 잡아 온 온갖 이국적인 맹수들을 아레나에 풀어놓고 사냥하거나, 맹수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잔인한 쇼였죠.

앞서 말씀드린 티투스 황제의 콜로세움 개장 기념 축제 때는, 100일 동안 무려 5,000마리가 넘는 맹수가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경기장을 물로 채운 모의 해전

더욱 상상 초월의 스펙터클은 ‘모의 해전(Naumachiae)’이었습니다.

이는 콜로세움 건설 초기, 즉 지하 시설인 히포게움이 건설되기 전에 가능했던 이벤트인데요. 말 그대로 경기장 아레나에 어떻게든 물을 가득 채우고, 실제 배들을 동원하여 해전 장면을 재현했다고 합니다.

모의해전

수만 명의 관중 앞에서 펼쳐지는 이 거대한 전쟁 쇼는 로마 제국의 기술력과 부를 과시하는 최고의 볼거리였을 것입니다.

이 외에도 콜로세움은 범죄자나 기독교도들을 맹수의 먹이로 던져주거나(Damnatio ad bestias), 십자가형에 처하는 등 잔인한 공개 처형(Noxii)의 장소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영원할 것 같던 제국의 쇠퇴와 남겨진 유적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콜로세움의 운명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경기를 유지할 만큼 제국의 재정은 더 이상 넉넉하지 않았고, 특히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검투사 경기는 점차 금지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435년에 마지막 검투사 경기가 열렸고, 523년에 마지막 맹수 사냥 쇼가 열린 것을 끝으로 콜로세움은 경기장으로서의 생명을 다하게 됩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콜로세움은 수백 년간 아무도 돌보지 않는 거대한 폐허로 방치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여러 차례의 대지진이 로마를 덮쳤고, 이때 콜로세움의 남쪽 외벽이 크게 무너져 내려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비대칭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진으로 무너진 콜로세움 남쪽 외벽

거대한 채석장으로 변해버린 비극

콜로세움의 진짜 비극은 중세 시대에 찾아왔습니다.

로마의 귀족들과 교황청은 새로운 궁전, 다리, 교회를 짓기 위한 건축 자재가 필요했는데요. 이들의 눈에 거대한 폐허가 된 콜로세움만큼 좋은 ‘채석장’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콜로세움의 잘 다듬어진 석재와 고급 대리석을 마구잡이로 빼내어 갔습니다. 심지어 돌과 돌을 고정하기 위해 사용했던 금속 고정쇠까지 모조리 약탈해 갔죠. 지금 콜로세움 외벽에 숭숭 뚫려 있는 수많은 구멍이 바로 그때의 흔적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비롯한 로마의 수많은 유명 건축물들이 사실은 콜로세움의 돌과 자재를 재활용해서 지어졌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한 역사가 아닐 수 없죠.

한때는 프란지파니라는 유력 가문의 요새로 사용되기도 했고, 혹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주택이나 작업장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빛과 그림자를 품은 살아있는 역사

오늘날 콜로세움은 부분적으로 파괴된 모습, 그 자체로 로마의 중심부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한 해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이탈리아 최고의 관광 명소이자, 로마를 넘어 이탈리아 전체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죠.

비록 그 안에서 벌어졌던 피비린내 나는 잔인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 제국의 경이로운 건축 기술, 세상을 호령했던 거대한 힘, 그리고 대중을 열광시키고 통제했던 그들만의 방식까지, 로마의 가장 빛나는 영광과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동시에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책’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습니다.